성경을 가르쳐야 교회가 산다 (1)
204.11.24 노우호 목사
오늘날 교회가 설교는 매우 열심히 하지만 실제로 성경은 거의 가르치지 않고 있다.
만약 목사가 성경을 몰라서 가르치지 못한다면 이는 참으로 큰일이다.
반대로 알고도 가르치지 않는다면 이는 더욱 더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일반 성도들의 지적수준이 많이 향상되어서 자신들이 직접 성경을 알기를 갈망하고 있다.
성경을 더 이상 목사의 전유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때가 되었다.
지금 이만희라는 사이비 이단이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하여 무료 성서신학원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기성교회 성도들을 무려 10만 명이나 끌어 모았다.
그들이 끌어 모은 사람들은 모두가 기성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직접알고 싶어서 찾아간 기성교회 성도들이다.
그들은 매일 새벽과 저녁에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있다.
설교자들과 목회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오늘날 성도들 중에 상당히 많은 분들이 영적으로 주리고 갈급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사야의 말씀을 들어보자! (사 5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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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
신학에 있어서도 성경은 참고서가 아니라 오리지널 텍스트여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신학대학교와 교회는 성경을 참고문서 정도로 여기고 있다.
교과서를 맡은 교사는 제1과부터 마지막 단원까지 성실히 가르쳐야 한다.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그 메시지를 전할 책임을 맡았을 경우에는 그 메시지에 임의로 더하거나 마음대로 건너뛰거나 할 수가 없다.
성실하게 전해도 원만하게 의사가 통할까 말까할 성경을 여기저기서 아무런 체계도 없이 이말 했다가 저 말 했다가 하면 성도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다.
단 두 시간이면 끝이 나는 영화한편을 보는 것도 처음부터 보지 않고 중간에서 보다가 여기저기를 보아서는 일관된 흐름을 알 수가 없다.
성경은 그 분량이 1754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책이다.
문학의 장르로 보아도 단순하지가 않다.
율법이 있고, 역사가 있으며, 예언이 있고, 시가 있으며, 오페라처럼 기록된 책도 있고, 희곡처럼 기록된 책도 있다.
어떤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기본적인 인트러덕션이 필요하다.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왜 기록했는지를 확실하게 알고 읽어야 한다.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 석사과정, 박사과정을 다 마쳐도 66권 중에 단 한권도 온전히 이해하고 읽는 책이 없다.
따라서 교회출석을 성실히 하고 있는 성도가 10년 혹은 20년 아니 평생을 다녀도 66권 중에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성경은 없다.
우리의 신앙이 바르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기초가 든든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에서 구약은 율법이라 하여 우리와 상관없는 것으로 알고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교회가 많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은 66권이다.
그 어느 한 권도 마음대로 소외시키거나 등한히 할 권리가 없다.
66권 중에 필요 없는 책은 단 한권도 없다.
사실로 말하면 서구의 신학은 제대로 정립된 적이 없었다.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된 박해는 311년까지 전후 10차에 걸쳐서 혹심하게 진행되었다.
그러할 때 교회는 언제나 지하에 있었다.
지하교회의 교육은 온전할 수가 없었다.
신약성경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경이 없었다.
그러나 성도들은 대체로 순수했다고 할 수 있다.
박해시대 교회는 오히려 순수하고 거룩했다.
순교를 무릅쓰고 증거하는, 그 증거에 깊은 감동을 받는 성도들이었고 또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 아니면 교회공동체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인간의 사변적인 신학이 아직 등장하지 않아서 단순한 기독교의 복음과 단순한 메시지 그리고 실천적인 형제애로 인하여 교회는 순수했다.
그러다가 AD 313년 콘스탄티누 황제가 기독교 자유를 선포하자 지하에 있던 교회는 지상으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시작된 교리논쟁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동안 사탄은 로마가톨릭이란 희한한 종교를 발명하여 주후 590년 교황 그레고리1세가 교회황제로 등극하게 되었다.
로마가톨릭은 성경을 읽지도 못하게 하고 1000년 동안 부패해 갔다.
그로부터 마르틴루터의 종교개혁 즉 1517년까지는 무려 1000년이 지나 갔다.
루터나 칼뱅, 존후스, 츠빙글리, 위클리프, 파렐 등의 인물들이 불과 1세기정도 개혁에 박차를 가했지만 이미 유럽의 지성인들은 로마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목도하고는 교회를 떠나서 이성주의, 인본주의, 계몽주의로 기울어진 후였다.
유럽의 교회가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에서 찰스다윈 같은 인물들이 나타났고, 독일에서는 진화론자들이 들고 일어났으며, 마침내 무신론이 나오고 유물론이 등장하는가하면, 진화론에 뿌리를 두고 공산주의가 유럽전역을 휩쓸고 있었지만 신학자들과 교회는 이에 대하여 함구하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 충격이 있은 후에는 신학자들이 위축되어 소위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면 신학자들은 함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위 성경학자 혹은 신학자들은 사실 죄에 빠진 사람의 영혼들과 씨름을 해 본적이 없이 그냥 도서관, 연구실에서 책에서 책으로 만든 신학으로 치우쳐서 끝없는 사변으로 치우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쉽게 기록한 성경을 과잉 해석하여 성경을 혼잡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 옛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성경을 끝도 없이 해석하고 해석한 것을 또 해석하여 성도들이나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아무런 실용적 가치가 없는 신학을 하고 있었다.
로마서는 불과 23페이지 밖에 안 되는 얇은 책이다.
책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작고 편지로서는 약간 긴 편지였다.
그 편지는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고린도에 약3개월간 머물면서 장차 가고 싶어 하는 로마에 미리 보내며 겐그리아 교회 여자집사 뵈뵈라는 자매가 전달했던 편지였다.
그 당시에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은 단지 편지를 던져주고 가는 오늘의 집배원 같은 분이 아니라 가지고가서 그 편지를 직접 읽어주고 약간의 설명도 했었다.
거기 무슨 주석이나 위대한 해석서 따위는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로마서를 해석하는 학자들은 얼마나 누룩을 많이 넣었던지 6000페이지나 되게 해석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구약 성경을 다 해석하라고 하면 457000페이지나 해석하여 마침내 1500권으로 만들어낼 것이다.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신학자 칼바르트는 교회 교의학이라는 책을 써서 유명한 신학자가 되었는데 그 책은 판형이 4-6배판에다 깨알 같은 글씨로 자그마치 8000페이지나 되었다.
바르트가 죽은 지 25년이나 되었지만 아직까지 그의 교회교의학을 다 읽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이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 누가 그 8000페이지를 읽어 줄 것인가.
앞으로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어느 교회 장로님의 기가 막힌 고백이 있다.
담임목사님께서 설교준비를 많이 하면 도무지 은혜도 감동도 없는데, 반대로 출장 가셨다가 오셔서 설교준비를 미처 못 하시고 그냥 성경을 읽어 나가다시피 하면 거기서 감동을 받는다고 했다.
그 예날 요시야 임금이 8세에 왕이 되어 왕이 된지 18년 즉 26세 쯤 될 때에 성전을 수리하게 했는데 제사장 힐기야가 성전에서 율법서 두루마리를 발견하였다.
왕하 2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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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돌아가서 보고하여 이르되 왕의 신복들이 성전에서 찾아낸 돈을 쏟아 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의 손에 맡겼나이다 하고
또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왕의 앞에서 읽으매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 |
오늘날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옷을 찢어 회개하는 사람을 만나볼 수가 없다.
요시야는 처음으로 들어보는 율법을 읽어만 주었는데도 옷을 찢고 회개하면서 자신의 죄와 조상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서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설교하는 분들과 교육하는 분들은 반드시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 온전히 가르쳐서 지키게 해야 한다.
바르게 가르쳐도 실천을 하는 문제가 아직도 남아있는데 가르치는 사람이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우리는 66권 중에 단 한권도 제대로 배운 것이 없습니다”라고 한다면 교사는 분명히 책임을 져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