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의 도시, 허영의 교회 (2)
2013년 6월 18일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제15회 전국수련회’ 박영신 명예교수
이러한 교회의 허영에 대하여 누구도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차라리 허영이 ‘정상화’되어버렸다. 허영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교회를 더 웅장하게 짓고 더 화려하게 꾸미고자 하는 대형화의 공모자가 되고 전위대가 된다.
이들은 교회의 재산이 눈덩이처럼 커져 그것을 둘러싼 다툼이 벌어지게 되면 거기에 끼어 들어야 하고 목회자의 후임자 선정을 두고 분란이 일어나게 되면 거기에도 끼어들어야 한다. 이들 스스로 허영의 덫에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허영의 도시에서 허영으로 길들여진 이들이 일구고자 함께 계획하고 운영해온 교회란 한낱 허영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눈여겨 볼 것은 이것이 반드시 대형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고 대형 교회 목사의 문제만도 아니라는 점이다.
대형 교회를 향한 허영의 꿈은 성장을 꿈꾸는 교회 일반에도 널리 퍼져 있고, 대형 교회의 강단에 올라가 설교를 하고 각종 부대시설을 만들어 그 거대 조직을 당당하게 부리고 싶은 허영의 유혹은 미래의 교회를 계획하는 목사들의 마음속에도 스며들어있다.
모든 교회가 앞 다투어 내로라하는 대형 교회를 벤치마킹코자 하고 대형 교회를 이끈 목회 경영자의 이야기를 갈급해 하고 그에게서 한 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이들은 허영에 젖어 무슨 일이건 돈이 있어야 할 수 있고 큰일을 하려면 모름지기 돈이 많아야 한다는 세상의 논리에 짓눌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도 돈이 많아야 하고 그러려면 교회가 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단순한 공식을 신앙하고 있다. 이들은 작은 교회라면 할 수 없는 ‘큰일’은 대형 교회이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대형교회중심의 이데올로기에 오래 동안 지배당해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이라면 대형교회 단독으로 할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모든 교회들이 힘을 모아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나아가, ‘큰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것이 허영의 도시에서나 통용되는 잣대에 따라 ‘큰’ 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닌지, 이들 누구도 묻지 않는다.
이렇듯 허영의 도시에는 붉은 십자가만큼이나 많은 허영의 교회가 즐비하고, 허영의 도시 거주민처럼 교회 안에는 허영심에 불타는 교인이 들어차 있으며, 그 한 가운데 허영심에 얽매인 목사가 올라서 있다.
4. 지평 초월
허영에 사로잡힌 이 도시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별달리 새로운 해답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오래된 대답만이 있을 따름이다.
허영으로 들뜬 이 도시와 교회는 그 지향성에서 하나의 지평에 서 있다.
이 둘이 단일 지평 안에서 함께 어깨동무하고 있다. 교회가 세상과 짝하면서 교회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허영을 허영인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그것이 추구하고 향유하는 것이란 허영일 뿐이라고 교회는 소리 낼 수 있어야 한다.
참다운 교회라면 그러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보는 이 모든 것은 바울의 저 유명한 표현으로 “쓰레기”이고 “아무 쓸모없는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의 길, 이것 밖에는 어떤 해답도 없다.
이것은 허영의 지평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말씀’이라는 지평에서 바라보면 허영의 지평은 벗어나고 넘어서야 할 지평이다.
이 ‘초월의 지평’에서 허영의 지평에 갇혀 있는 이 도시의 교회와 목사와 교인을 향하여 그 지평에서 벗어나라고 소리 높여 외칠 수밖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
초월 지평에서 누리는 기쁨은 특별한 것이다. 허영의 도시에서는 차마 맛볼 수 없는 새로운 삶의 세계를 맛보게 된 그 자체가 놀랍고 뜻 깊은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허영에 들어 허영의 삶을 목표로 삼아 그것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데, 초월 지평에 들어 도시의 허영이란 덧없는 허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특권이 아닐 수 없다.
허영의 삶밖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하는 그 삶의 지평을 초월하여 허영의 삶을 ‘쓰레기’라고 이름붙일 수 있게 되고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없는 것’이라고 당당히 평가 절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 사실은, 실로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허영의 눈으로 보면 ‘말씀’이 가르치는 삶이 어리석게 보이지만 ‘말씀’의 눈으로 보면 세상이 값있다고 하는 바로 그것이 허영의 부스러기로 보일 뿐이다.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기준을 뒤엎어버리는 통쾌한 이 삶, 그것은 지평 초월의 체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제 교회는 세상의 허영에서 벗어날 때를 맞고 있다. 교회를 거대하게 지어 눈부시게 꾸미고 교회 안의 모든 시설을 화려하게 만들어 사람의 눈을 마냥 즐겁게 해야 할 것인가, 하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허영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질없는 것이라고 외쳐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 허영의 도시를 뚫고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순례자의 공동체로 서 있어야 한다. 진정 목회자라면 교인의 허영심에 장단을 맞춰 교인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허영의 시험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는 교회 대형화를 향한 허영심의 시험도 능히 물리친다.
그리고 그는 순례의 길에 들어선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허영의 세계에서 따돌림 받은 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서로 격려하고 위로 하는 순례의 길동무가 되어, 지평 초월의 믿음 안에서 서로 배우고 가르치며 함께 성숙해 가도록 기도한다.
말씀에 뿌리내린 목회에 헌신코자 하는 사람이라면 교인이 늘어나는 것에 대하여 무턱대고 기뻐하기보다는 차라리 깊은 물음을 던진다. 행여 그것이 자신의 설교가 교인의 허영에 장단 맞추었기 때문은 아닌지, 그 허영에 말씀을 뒤섞어 일종의 ‘종교 혼합주의’를 발동시켰기 때문은 아닌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말씀을 증거 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닌지, 섬세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그리고 허영의 도시에서 경제 성장을 말하고 경제 규모를 들먹이면서 모든 것이 ‘커야 한다’는 가치 때문에 ‘작은 것’을 무시하게 된 것을 이들 예수의 사람은 다시금 새김질한다. 이들은 지평 초월의 세계에 잇대어 삶을 추슬러, 통째로 허영의 도가니가 된 이 시대에 맞서 하나님이 주신 분량대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에 따라 묵묵히 일해 나간다.
그렇게 이들은 대형 교회에 주눅 드는 다수를 천하게 여길 줄 아는 믿음의 품위를 실행해 간다.
이들에게는 허영의 도시에서 대형교회로 나아가는 어떤 교회가 결단코 본받을 모형으로 떠오를 수가 없다. 이들에게는 그 어떤 것도 우상이지 않기 때문이다.
5. 맺으며
한국교회의 문제는 어느 한두 가지로 다 말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 문제를 두고 깊이 연구했다고 할 만한 것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수많은 대형교회가 있는데다 곳곳에 신학교육 기관이 있고 거기서 가르치는 수많은 신학 교수들이 있음에도 그러하다.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한 세기 하고도 반세기가 되고 있음에도 신학은 아직도 우리의 현실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의 신학에서 배운 자투리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으로 우리의 교회 현실을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묻는다. 우리나라의 교회와 기독교의 문제를 두고 깊고도 균형 있게 가르치는 신학교가 과연 있으며, 넉넉히 ‘신학자’라고 불릴 수 있는 교수는 몇이나 되는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서양 교수들을 불러 세미나다 심포지엄이다 하는 모임을 연다고 해서 해결 될 것도 아니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교회 문제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문외한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교회 문제는 현장에서 목회하는 우리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고 다짐해야 할 뿐이다. 분명 이 일이 우리에게는 벅찬 것이지만 이것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이 각오로 우리는 개신교의 전통을 새삼 떠올린다.
개신교의 정신은 세상―여기서 말하는 허영의 도시―을 ‘거부’하면서 살아가는 데 있다.
세상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부’하고 ‘부정’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에 겨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신교도라면 지켜가야 할 신앙이고 실천 행위이며, 걸어가야 할 삶의 길이다.
허영의 도시가 더럽다고 그것이 보이지 않는 어느 한적한 곳으로 물러서서 자기 수양을 일삼아서도 안 되며, 피정이다 수양이다 하면서 쳇바퀴 돌듯이 허영과 명상을 되풀이하는 삶의 주기를 능사로 삼을 수도 없다.
그 모든 것은 허영의 영원한 승리를 보장해줄 따름이다.
우리는 허영이 난무하는 현실의 삶 한 가운데서 그것에 맞서 그것을 뚫고 나아가야 한다.
허영에 둘러싸여 살아가야 하지만 허영과 짝하지 않고 허영과 맞부딪히지만 도망가지 않고 싸우면서 살아가야 한다.
허영의 단일 지평에서 지평 초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란 결코 간단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 삶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 많을 수 없다.
소수이다. 좁은 길이다.
그러한 길에 들어서 순례의 길을 걷도록 부름 받은 자가 그리스도인이며 그러한 자들이 모인 곳이 말씀의 교회인 것이다.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가?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하늘의 물음이다.
“이 땅 위에는 우리가 차지할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span style="font-family: 굴림; background: #ffffff; letter-spacing: 0pt; font-size: 11pt; mso-font-width: 100%; mso-text-raise: 0pt; mso-ascii-font-fami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