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4-01 19:19
허영의 도시, 허영의 교회 1 (박영신 교수)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2,062  
 
 
허영의 도시, 허영의 교회 (1)
 
2013618일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15회 전국수련회박영신 명예교수
 
 
1. 머리에
 
한국교회가 오늘날처럼 수모를 겪게 된 시대는 없었다. 별별 이름을 붙여 교회와 기독교를 비하하는가 하면 목회자를 희화하는 데 모두가 익숙하게 되었을 정도이다. 이 모든 것은 넉넉히 이해할만 하다. 교회와 목사가 부리는 추태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서서 교회가 잘하고 있는 것이 많은데 대중매체에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볼멘소리로 아무리 대응해봐야 역효과만 나온다. 이것은 여러 사회 조사의 결과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리하여 뜻있는 이들은 이와 같은 조사가 나올 때마다 교회의 각성과 반성을 촉구하고 나온다.
 
그러나 생각 깊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사회 조사가 나오기 이전부터, 아니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한국교회에 대하여 깊이 새김질해 왔다.
이들은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교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늘의 우리 교회를 어떻게 보실까 하는 것이 두렵고 떨리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는 모든 판단의 근거와 기준은 말씀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예언자의 전통을 따라 말씀에서 벗어나고 있는 교회를 두고 가슴 치며 애통해 왔다. 그리고 외쳤다.
하지만 이들에게 귀 기울이는 자들은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오늘날 교회가 이처럼 우리 사회의 웃음거리가 되어서야, 그리고 교회에 대한 사회 조사의 결과를 보고서야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고 느끼게 된 것은 때 늦은 것이지만 때에 맞는 것이기는 하다. 사회조사의 내용은 이리저리 헤아려보아야 할 자료이다. 하지만 근본에서는 말씀에 비추어 오늘날의 우리 교회를 비춰보아야 한다.
 
 
2. 허영의 도시
 
오늘의 우리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정치 이념이나 선호와는 상관없이 군사 쿠데타 이후의 사회 변동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두가 지난 50년 동안 우리가 겪어온 발전을 귀하게 여기고 있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삶은 그때 시작한 경제 성장의 덕분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실체는 어떤 것인가?
 
익히 알다시피 우리는 잘 살아보자는 경제 성장의 행군에 묵묵 동참해온 나머지 오늘의 물질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제도 교육을 통하여 앞서 배우게 되었던 인권이니 자유니 하는 민주주의의 가치조차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간단하게 내팽개쳐버리게도 되었다. 가난했던 지난 날을 청산하고 하루 속히 모두가 대량 소비를 즐길 수 있는, 오직 그러한 뜻에서 잘 사는나라를 만들자는 구호에 모두 복창하며 우리는 성장의 역군으로 자임하였다.
 
그러한 나라를 건설하자며,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모두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마이 카시대를 앞당기자며 모두가 밤낮없이 일해 왔다. 우리는 모든 초가집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는 지붕 개략 사업도 쉽게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경제 성장의 논리로 무장한 국가 주도의 동원 체제는 그렇게 국민을 온통 황홀 속으로 휩쓸어갔다.
 
강력한 산업화 정책으로 여기저기에 공장도 들어섰다. 공단 지역이 만들어지고 농촌을 떠나 도시도 옮겨가는 거대한 인구 이동의 현상도 일어났고, 급기야 고속도로도 건설되고 모두가 자가용으로 이동하는 마이 카 시대에도 진입했으며, 그다지도 바라던 소비 생활도 즐기게 되었다. 소비 욕구를 부추기는 온갖 소비재가 도시에 넘쳐나 도시는 화려한 소비 도시의 면모를 갖춰갔다. 우리 국민은 모두가 잘 살게 되었다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물질 영역에서만 그러할 뿐이었다.
물질의 풍요만을 제 일차의 것으로 믿도록 국가가 밀어붙인 그 동원 체제 밑에서 반세기를 살아오는 동안 모두가 물질 획득에 대한 관심 그 너머의 관심 세계를 그려볼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삶의 균형 감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오로지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을 구하였고 그것을 당연한 삶의 길이라고 신앙하게 되었다. 값비싼 것을 먹고 값비싼 옷을 입고 값비싼 집에서 살고 값비싼 차를 몰고 값비싼 물건을 사는 소비의 즐거움과 소비를 통한 과시 욕구, 그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세계 제일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의 교육열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것을 확보하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른바 일류 대학에 입학하여 졸업한 다음 재벌 기업체에서 직장을 얻고자 하거나 무슨 국가시험에 합격하고자 경쟁하며 분투하는 것, 이 모두가 잘 먹고 살겠다는 한 목표를 향하고 있다. 그것이 부모가 자식을 몰아가며 교육시키고자 하는 교육열의 실체이다. 그러한 욕구가 우리나라의 모든 국민을 분기시키고 광분케 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대량 소비를 즐길 수 있는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 목표를 향해 우리 국민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일해 온 끝에 드디어 그것을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우리는 소비라는 성장의 과일을 여유롭게 따 먹으며 삶을 즐기고 있다. 이것은 놀라운 역사의 쾌거이다. 극악무도한 일제 강탈의 만행도 겪어야 했고 해방은 되었지만 남과 북이 맞붙어 싸움질까지 한 전쟁도 해 본 마당에, 앞서 간 다른 나라들을 따라잡아 대량 소비의 시대를 만들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한 마디로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켜주려는 허영의 도시 건설을 뜻하였다. 박 정희 정권 이후 국가가 앞장서 이 허영의 도시를 건설코자 했던 셈이다. 우리 국민 모두는 이 허영의 도시 거주민이 되었다. 우리는 허영의 도시민이 된 것을 자랑으로 여겨 이 도시를 일군 건설자라며 그를 칭송하며 오늘도 유쾌하게 살아가고 있다.
 
 
3. 허영의 교회
 
정부가 이끌어간 경제 성장의 대열에 교회는 기꺼이 함께 했다.
필요하다면 그 대열에 앞장서기도 했고 뒤에서 그것을 떠받쳐주기도 했다.
다른 말로 교회는 군사 쿠데타 정권의 성장 정책에 합류하여 그것을 정당화하는 충실한 시녀의 역을 맡아왔다. 이것이 현대 한국교회의 역사를 특징짓게 되었다.
 
교회는 경제 성장의 자원을 최대한 동원한 성장의 이용 주체이자 수혜자였다.
경제 성장 정책은 교회가 성장하는 데 더 없이 편리한 조건이 되고 동력이 되었다.
지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교회는 놀랍게 성장했다. 교인의 수가 1960년에는 고작 백만 정도였으나 1970년에는 그 배가 넘더니만 1980년 가운데에 들어서서는 인구의 약 20퍼센트가 되는 천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인구의 도시 집중화에 따라 전체 인구의 9할이 도시에 몰려들게 되어, 정부는 이들에게 살 집을 지어주어야 했다. 주택 개발 정책이 나왔고 뒤따라 건설 붐이 일어났다. 이들 개발 지역은 교회의 개척지가 되었다. 구도심 지역에 있던 교회를 팔고 신개발 지역에 새로 땅을 사서 교회를 짓기도 하고, 아예 주택 개발지역을 찾아 교회의 문을 새로 열기도 하였다. 개발 지역 곳곳에 교회가 자리 잡고 나왔다. 정부의 대규모 개발 정책은 교회의 설립을 북돋았을 뿐 아니라 대형 교회의 건축을 꿈(?)꾸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 대형 교회가 나타났고 모두가 그러한 교회를 본보기로 삼아 몸집을 불려나가고자 했다. 그것이 교회의 부흥이고 그것이 기독교의 전파의 공식이 되기에 이르렀다.
2007년에 나온 조사에 따르면, 주일마다 예배에 출석하는 교인의 수가 5,000명이 넘는 이른바 메가 처치35개나 되었고, 같은 해 외국의 유력지는 80만이 넘는 교인을 둔 세계 최대의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비롯하여 세계 10대 개신교회 가운데 5개가 한국에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대형 교회를 세우게 된 목사는 개발 정책을 기회로 삼아 성공을 거둔 부동산업자 못지않은 출중한 능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교회가 커진다는 것은 머리수만 많아진 것을 뜻하지 않았다. 교회의 수입도 불어났다. 교회는 교인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우람하고도 호화로운 예배당을 지을 뿐만 아니라 교인에게 갖가지 편의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시설도 갖춰나갔다. 되도록 모든 것이 교회 안에서 충족될 수 있도록 교회는 자기 충족 욕구를 채워나갔다. 교회가 묘지를 마련하는가 하면 산천이 좋은 데 기도원이나 수양관을 짓기도 했다.
 
나아가 교회 안에 카페도 열고 공연장으로 쓸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해두고자 했다. 자기 교인들에게 모든 편리를 제공해 주고자 하여 만든 교회 안의 각종 편의 시설이 교회 바깥 이웃들의 삶의 터전으로부터 교회를 분리시켜 새로운 담벼락을 치는 결과를 빚게 되었지만, 그런 것은 교회주의에 빠진 이들에게는 전혀 관심 둘 바가 아니었다. 모든 것은 교회 중심이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개발 지역에 덩치 큰 교회가 이곳저곳에 다투듯 세워졌다.
 
교회가 대형화될수록 교회의 목회는 경영이 되어 성공/성장 기업체에서 배우며 그것을 닮아갔다. 목회자는 기업 조직을 경영하는 경영주처럼 되고 목회의 능력은 곧 경영의 능력처럼 되어 갔다. 목회자는 자연스럽게 기업 조직의 총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처신하며 군림하게도 되었다. 기업체의 크기에 따라 그 총수의 지위가 달라지듯이 교회의 크기에 따라 담임 목사의 지위도 달라졌다. 큰 교회를 목회 경영하는 교회 총수라는 자리 때문에 담임 목사가 행사하는 막강한 권리를 당연하다고 여기게끔 되었다. 대형 교회는 중세 교회의 거대함과 호화스러움을 뒤따르고 대형 교회의 목회 경영자는 중세 교권주의자들처럼 엄청난 권력을 휘둘러대었다. 이들 목회자는 화려한 가운을 입은교회 조직의 경영자이고 기업가였다.
 
경제 성장이 가져온 허영이 교회 안으로도 들어와 교회 자체가 허영의 교회가 되고 목회자가 허영에 휩싸이고 교중이 허영을 떠받들고 허영을 즐기는 판국이 되었다. 목사는 색채가 풍부한 가운을 몸에 걸치고 거대한 교회당의 강단에 올라가 설교하고 갖가지 그런 모습으로 자주자주 행사장에 나타난다. 교인은 그것을 허영이라고 여기지 않고 오히려 엄숙하게 받아들인다.